목양실에서(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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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병영일기(2013년 추수감사절을 준비하면서..)
2013-11-02 15:51:35 현영한  

한국 성인 남자들에게 ‘군대’라는 곳은 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모이기만 하면 결국 군대 이야기를 꺼내어 자신들이 겪었던 과장된(?) 무용담을 경쟁하듯 떠들어 댑니다. 저에게 역시 한국에서 경험한 군 생활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했던 곳이라 늘 군대 시절의 그리움이 더합니다.

 

제가 처음 군에 입대해서 간 곳이 논산 훈련소였습니다. 태어나서 가장 혹독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경험을 치르면서 한 주간을 정신없이 보내다가 처음 교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미 중학교 때부터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있었기에 훈련소에서 교회를 가는 일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배당에 들어가 자리에 앉자마자 정신없이 흘려 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좀 힘들고 서러운 마음 때문이려니 생각했지만 예배가 끝날 때까지 계속 두 눈에 눈물이 흘러내렸던 이유는 힘든 훈련병 시절, 그래도 주일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신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군 생활에 드리는 첫 예배 때 저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제가 군대서 신앙생활 잘 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절대 주일 예배를 빠지는 일이 없게 하시고 전우들에게도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살 수 있게 해주세요. 저는 그렇게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헌신을 했습니다.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를 한 후 저는 처음으로 저의 이런 기도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게 되었습니다. 
 

길고도 짧았던 한 달간의 기초 군사훈련을 마쳐갈 무렵, 당시 용산에 있던 육군 본부 에서 근무 하게 될 병사들을 차출(recruit)하기 위해  몇 명의 훈련병들을 호출했는데 그 때 나도 그 중 한 사람으로 불려가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주변의 동기들이 제게 말하기를 “잘 되는 놈들은 머가 다르긴 다르다”고 말을 들으며 당당하게 인터뷰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저는 그 때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응답해 주신 줄 알고 확신 했습니다.

 

당시 육군 본부에 근무하는 것이 정말 최고의 보직이었기 때문에 그곳에 가면 신앙생활도 잘 할 수 있고 집도 가까워 자주 부모님을 뵐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 입에서는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하나님” 찬송이 저절로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기대감으로 논산 훈련소에서의 훈련 기간을 마치고 자대로 배치되는 기차를 타게 되었습니다. 빛나고 찬란한 이등병 계급장을 가슴과 모자 한 가운데 달고 있는 수백 명의 병사들을 태우고 군용 열차는 서울로 올라가면서 중간 중간에 자대에 배치되는 병사들을 내리면서 드디어 서울 용산역에 도착을 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키가 크고 잘 생긴 하사관이 우렁찬 목소리로 육군본부에서 근무하게 될 신병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함께 인터뷰를 했던 몇 명의 친구들의 이름이 불리면서 저의 이름도 당연히 호명될 줄 알았지만 끝까지 저를 불러주는 이름은 듣지 못한 체 육중한 군용 열차가 서서히 움직여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그 때 느꼈던 배신감과 당혹감은 지금도 생각하기 싫을 정도였습니다.

 

결국 제가 최종 도착한 곳이 ‘춘천 102 보충대’라는 곳이었습니다. 당시 논산 훈련소에서 제일 재수 없는 신병들이 가는 곳이 바로 102 보충대라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설마 내가 여기까지 오다니..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10월 중순의 가을 하늘이 캄캄하게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 때부터 저의 기도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였습니다.

 

102보충대의 80% 신병들이 전방 부대에 배치된다고 했지만 저는 춘천 외각에 있는 공병 여단소속의 ‘부교중대’(병력과 군용차량들을 도하(渡河)시키는 임무를 띤 부대)로 배치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102보충대에서 가장 잘 풀린 신병들이라는 선임 하사님의 느낌 없는 위로를 받으며 커다란 천막으로 뒤집어 쓴 군용트럭을 올라타고 제2 공병 여단 본부로 가게 되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난 뒤부터 여단 본부에 속한 부대의 선임 하사관들이 자기 부대에 속한 신병들을 데리고 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갑자기 여단 군종 목사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향해 “군대 오기전에 교회 잘 다니고 피아노로 찬송가 반주를 할 수 있는 사람 손들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바로 이때다 싶어 번쩍 손을 들고 나갔고 군종 목사님은 저의 신상과 신앙 경력에 대한 몇 가지 질문을 한 후 그리 만족하시는 눈빛은 아니었지만 저의 개인 짐이 담겨져 있는 ‘더블백’을 들고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여단 소속 교회 군종 사병으로 근무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단 군종사병 생활은 군대에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사택 같은 곳에서 민간인처럼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바다를 먹물로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도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라는 찬양을 부르며 그 엄청난 축복의 영외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새벽 기도회를 준비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했고 낮에는 목사님과 함께 심방하는 일을 도와 드리면서 영관급 부인 집사님들께서 직접 요리해 주신 맛있는 음식도 먹으면서 “주님 여기가 좋사오니 천막 셋을 짓고 예수님과 함께 그 변화산에서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의 그 마음을 나도 갖게 되었습니다.

 

저는 날마다 기도와 말씀으로 저의 신앙을 훈련받게 되었고 믿음도 제법 많이 성장하고 있었던 같았습니다. 그런데 8개월이 지난 후에 행복하기만 했던 저의 군생활에 갑자기 또 한 번의 먹구름이 몰려왔습니다. 독실한 천주교인이신 새 여단장님께서 부임하시고 난 뒤 어찌된 일인지 몰라도 저는 더 이상 교회 사택에 있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게 되었고 제가 원래 소속된 중대로 복귀하게 된 것입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주특기가 군종사병이 아닌 제가 여단 군종병이 된 것이 잘못된 이유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만감이 교체되면서 저는 춘천에서 차를 타고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강원도 ‘화천’에 위치하고 있는 저의 소속 부대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때 또 한 번의 버림 받은 느낌을 받으며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당시 제가 속한 부교중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인근의 부대 사람들이 우리 부대를 “화적떼 소굴”이라고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선임들이 울퉁불퉁한 방망이를 든 도깨비들처럼 모여 있던 곳이었습니다
. 그 다음날 아침 점호시간에 그 부대에서 아침마다 부르는 중대노래가 있었는데 그 첫소절 가사가 이렇습니다. “여기는 거래리 도깨비마을~

 

깊은 산골에 불쑥 나타나는 들짐승들보다, 북한에서 난파한 무장 간첩들보다 더 무서운 선임들과 함께 내무 생활을 해야만 하는 곳에서 저의 군 생활이 다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매일 매일 얼차려를 받기위한 집합과 뒷전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폭행의 나날들을 기억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칠 지경이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래도 저는 여단에서 온 군종병이라고 좀 봐주긴 했지만 저에게는 그게 그거였습니다. 그 때부터 저의 기도는 “하나님 하필 왜 이곳입니까? 왜 저를 이런 곳으로 보내셨습니까? 매일 밤마다  초병 근무시간에 이런 기도를 되 내이며 하루하루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악몽 같았던 한 주간이 지나고 난 뒤 일요일(주일)이 되었지만 군에서 허락된 종교 행사는 흐지부지된체 선임자들 몇 명명만 화천읍에 있는 교회나 절에 간다는 핑계로 외출을 하는 행사로 바뀌어져있었습니다.

신병이었던 제가 앞으로 몇 개월 동안은 화천읍에 있는 교회 예배시간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못하게 된 상황이 된 것이었습니다. 정말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일 오전 10시경, 갑자기 교회 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종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올라가 보았더니 제가 속한 부대에서 5분 거리도 안 되는 곳에 한국 전쟁 때 세워진 고아원이 있었는데 그곳에 속한 작은 교회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 20여명이 모여 예배당 안에서 장난을 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들에게 “왜 예배를 드리지 않고 이러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주일예배를 인도해줄 목사님이 계시질 않는다는 겁니다. 화천읍에 살고 계시는 고아원 총무님께서 오시면 예배드리고, 안 오시면 그냥 안 드린다는 겁니다. 그 날은 총무님이 오시지 않는 주일이어서 자기들끼리 모여서 놀고 있었다는 겁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내가 예배를 인도하면 안 되겠냐”는 제안을 했고 저의 제안을 받아들인 그 아이들과 함께 첫 주일 예배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준비도 안된 주일 설교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도 안나지만 내 생애가운데 아무도 안알아주는 가장 감동적인 설교였다고 스스로 위로했었습니다. 

 

저는 주 중에 고아원 총무님을 만나서 앞으로 매 주일 마다 예배에 참여하고 총무님께서 못 오시는 주일에는 제가 대신 예배를 인도할 수 있냐고 말씀을 드렸더니 총무님께서 그냥 앞으로 매 주일 마다 예배를 인도해달라고 도리어 제게 부탁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30개월 만기 제대할 때까지 매주일 그곳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어설픈 설교였지만 하나님 말씀도 전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우리 부대원들 가운데 예수를 믿는 부대원들도 함께 참여하게 되면서 저는 목회 아닌 목회를 하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이곳이 바로 저의 첫 목회지였다고 저는 감히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군 생활을 마감할 때쯤에 비로소 제가 처음 훈련소 부대에서 눈물을 흘리며 군대에서 신앙생활 온전히 잘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그 기도가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가운데 이루어져 있었음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2013년 추수감사 주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나의 갈길을 가르치시고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이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이사야 48:17)

현영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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